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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봤어요

순무처럼 느려도 괜찮아 책 리뷰_번아웃 극복과 고양이의 관계

by 냥호구마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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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처럼 느려도 괜찮아, 윤다솜 지음, 북클라우드 출판

회사 생활 10년, 번아웃 증후군과의 조우

서울에 상경해 처음 입사한 회사는 전공이 아닌 것은 차치하고, 관심도 없는 일이었어요. 아무 준비도 없이, 조금은 안일하게 생각하고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 익숙하지 않은 일. 다시 본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와서 시작한 일이니 금방 포기하기 싫어 어떻게든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서울 생활 십 년을 넘겼고, 두 번의 이직을 했어요. 조금 빠르게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고,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야근과 밤샘이 많아도 당연하게 여기고 일했습니다. 어떤 프로젝트는 나름 괜찮은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그걸 위해 겪어야 하는 실패는 당연히 무척 많았습니다. 누적되는 피로에 건강은 나빠졌고, 성과에 대한 압박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지는 인간관계에 악몽에 시달리다 깨는 일이 매일 계속되었어요. 어느 날부터 출근 준비를 하면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났고,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씻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생을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어요.

 

그땐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했지, 이게 번아웃 증후군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번아웃 증후군에 관해 알게 되었을 때도 좀 쉬면서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면 또 괜찮아지겠지. 금방 다시 괜찮아져서 전처럼 일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결과적으로 첫 번아웃 증후군이 왔을 때,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혔지만, 병가 처리를 해 줄 테니 조금 쉬다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급 휴직이라 해도 어찌 되었든 회사에서 배려해주는 것이라 생각하니 차마 거절하지 못해 3개월 정도 쉬기로 했습니다. 회사에 복직했을 때, 거래처와 회사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 '정말 돌아올 줄 몰랐다.'고 했어요. 물론 복직이 코앞에 닥쳤을 때 두렵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래도 일이 힘들었지 회사가 싫었던 건 아니라 돌아갔습니다. 

 

처음 몇 개월은 전처럼 일할 수 있었어요. 이전보다 팀원들과 잘 지냈고, 업무적인 합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어요. 쉬었다 일을 다시 해서 그렇다고 넘어가기에는 스스로 심각하다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심하게 화가 나는 일이 잦아졌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렇게 화가 날 일이 아니었는데. 

 

첫 번아웃 증후군은 전초전이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번째는 심각했습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휴대폰 전원도 꺼놓았어요.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렸죠. 번아웃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금 쉰다고 좋아지는 그저 단순히 지쳤다거나 피로감이 쌓인 것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고양이를 만나다

 

반년 정도 쉬고,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원래 하던 일과 업무는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결의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어려움은 있었어요. 텐션은 늘 낮았고, 집중력이 오래 유지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음이 초조했고, 잘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었어요. 

 

업무 미팅 때문에 광화문에 갔다가 겸사겸사 교보문고에 들렀어요. 사고 싶은 책이 있는 건 아니라 그냥 멍하니 서점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신간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순무처럼 느려도 괜찮아. 표지 색상이 눈에 들어왔고,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 책장 안 곳곳에 배치된 것이 좋아 몇 페이지를 읽어봤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책을 읽으며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뭐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저 술술 잘 읽히길래 계산했을 뿐입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읽고, 집에 도착해서도 손에서 놓지 못했어요. 순무가 나와 닮아서? 순무 보호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이 책의 무엇이 저를 끌어당겼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느려도 괜찮아.'라는 제목 속 문구가 그 당시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생각이 너무 많고, 행동으로 옮기는데 오래 걸리는 사람. 시작하기 전에 리스크부터 생각하는 사람. 일을 미루는 사람.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라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기 싫은 일도, 두려운 일도 일단 무조건 하겠다고 손을 들자. 나에게 맞는 속도를 모른 채, 내가 가진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턱대고 열심히, 죽어라 했던 거죠.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지금도 가끔은 정말 괜찮은 게 맞을까,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망설입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대단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책이 나도 조금 쉬어가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것은 분명해요. 책을 읽고 나서 나중에야 순무의 인스타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지금은 유튜브 채널도 있고요.

가끔 순무를 보며 순무보다 내가 더 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뱅갈 고양이 냥아치 루치

아직 천천히 나아가는 중이니까 느려도 괜찮아

번아웃 증후군을 겪던 시기에 첫 반려묘 베르를 입양했어요. 베르를 입양하면서 퇴사를 결심했는데, 결국 3개월 병가가 되었던 거죠. 그래도 쉬면서 베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게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작고 어린 고양이는 서너 시간에 한 번 밥을 줘야 했고, 새벽에도 두어 번 일어나 챙겨야 했어요. 자다 깨면 제 손길과 품을 찾는 아이를 안아주고 달래주면서 사랑한다고, 나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너는 소중한 고양이라고 소리 내 말하다 보면 이상하게 내가 위로받는 기분이었습니다.

 

회사로 돌아갔다가 더 강도 높은 번아웃이 왔을 때도 고양이들은 힘이 되었어요. 적어도 고양이 화장실은 치워야 한다, 사료는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닥난 의욕을 끌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담도 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고양이가 번아웃 극복의 치료제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도 완전히 번아웃 극복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고, 계속 나아지고 있어요.

 

어떤 이에게는 책임져야 할 생명이 있다는 것이 더욱 압박으로 느껴질 수도 있어요. 이 글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무조건 반려동물 입양을 추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고양이를 반려하면서 내가 받았던 위로들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여전히 정말 느린 사람이에요. 그래도 천천히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들을 하나씩 해보고 있어요. 그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겁이 나지만 멈추지 않고 느릿느릿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괜찮아, 내가 계속해서 나아가려면 이 속도로 가는 게 맞아. 나는 조금 느린 사람이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 책을 읽고, 잠시 쉬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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